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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투자 경제

역사에서 본 투기-튤립파동

by 리치엔 2020.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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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투자를 위해서는 투기와 투자에 대해 분리할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투자와 투기의 극명한 차이는 익히 알고 있는 튤립 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집 한 채보다 비싼 튤립 한 뿌리. 튤립에 투자한 이들이 바보스럽다며 본인은 절대 빠지지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1630년대 네덜란드의 튤립투기 현상은 시대가 변한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는 상황. 튤립이라는 대상을 두고 어떤 방식으로 거래했는지 거래자들의 포지션을 분석해 본다면 투기의 행태와 투자의 자세가 다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픽사베이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30년 전쟁으로 동유럽 직물산업이 붕괴됨은 1630년대 네덜란드 직물산업 호황을 가져왔다. 1631년 암스테르담거래소는 새 건물로 이사했고 옛 자카르타 지역인 바티비아를 차지한 동인도회사의 주가는 17세기 최고의 상승세를 였다. 1630년대 네덜란드는 유럽국가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고 교외에 대저택을 들어서는 등 부동산가격도 급상승하는 호황이었다. 늘어난 부에 네덜란드인들은 칼뱅주의적 검약정신에서 소비지향적 성향이 되었다. 풍요 속 오만이 커지며 과시욕도 생겼고 더 큰 부를 안겨줄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1630년대 네덜란드 경제상황은 투기 바람이 불 수 있는 아주 좋은 조건이 된 것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꽃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지리적 이유로 국토가 좁은 네덜란드에서는 대형공원을 갖출 수 없어 작은 공원을 만들어 한가운데에 아름답고 값진 꽃, 튤립을 심었다. 튤립 덕분에 네덜란드의 농촌분위기가 산뜻하게 바뀌었고 좁지만 기름진 땅은 튤립이 뿌리를 잘 내리도록 알맞은 조건을 제공했다.

 

 

출처 픽사베이


튤립뿌리는 1500년대중후반 터키에 파견됐던 네덜란드대사 오기에르 부스베크가 유럽으로 처음 전했다고 한다. 따라서 튤립이란 꽃이름은 터키인들이 즐겨쓰는 터번을 의미하는 튤리판(tuhpan)에서 유래된 것. 부스베크는 1573년 네덜란드 최고 식물학자인 카를루스크루시우스에게 튤립 한 뿌리를 선물, 그가 번식시켜 여러 사람에게 배분, 자신의 집필 식물도감에도 등재했다고 한다. 소수가 소유하게 된 만큼 초기 튤립은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이 됐다. 또한 튤립의 꽃 색깔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며 위계서열에 따라 군계급과 같은 이름을 붙여졌다. 최상급 꽃은 잎에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줄무늬가 있어 '황제', 총독과제독, 장군 순으로 명명된 것. 1624년 황제튤립은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1,200플로린에 거래됐다고 한다.


고위급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튤립이 다수의 투기 대상이 된 이유는 튤립 꽃이 만개할 때까지 무늬와 색깔을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의 뿌리가 황제튤립이 될 지, 평범한 꽃잎을 피울지 알 수 없음. 이것이 투자와 투기의 갈림길을 제공해 줬는지 모른다.

 

 

그리고 튤립투기는 가난한 서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그들은 당시 비싼 동인도회사와의 주식에 투자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튤립 뿌리는 손쉽게 경작할 수 있었고 거래를 막는 길드도 없었으니. 튤립뿌리가 채취되는 여름에 열렸던 튤립시장은 인기가 오름에 1년내내 거래할 수 있는 매매방법이 생겨났고 재배농가는 심은 튤립뿌리를 구체적으로 표시, 거래일지로 그 동안 체결된 거래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튤립뿌리는 표준화됐고, 주식처럼 취급됐다.

 

 

 

네덜란드에서 튤립값이 고공행진하자 프랑스인들드 1634년 파리근교와 프랑스북부에 튤립회장을 열기도 하는 등 튤립투기가 국제화되는 양상이었고 뒤늦게 투기에 뛰어 든 네덜란드인들은 방직 방적공이나 구두 채소장수, 농사꾼 등이었다. 이때 부유한 꽃 수집가들과 암스테르담 거상들은 튤립투기에 관여하지않았다. 튤립은 그들의 부를 과시할 수단이었을 뿐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님을 인정, 튤립 가격이 상승하자 메리트가 없어진 것이었다.

 

 

이제 그들(서민 등 일반인)만의 리그가 시작된 것이었다. 튤립시장은 교통의 발달로 사람들을 모이게 했고, 그들은 여관 등에서 형식구애없이 무리지어 집단적으로 거래하는 방식을 꾀했다. 중개인들과 투기꾼들은 값을 흥정하고 거래하는 1대1거래와 경매방식을 채택. 오늘날과 비슷한 양상이기도 했다. 여관에 들어갈 때 지니고 온 돈보다 집으로 가져가는 돈이 많을 때까지 긴 여행을 했고 아침부터 새벽 2~3시까지 거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 몫 잡거나 거래가 성사되어 받을 돈이 있는 투기꾼들은 새 마차와 말을 사들여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고 한다.

 

 

튤립뿌리는 겨울에 땅 속에 묻혀있어 거래가 성사되더라도 인도할 수 없다. 1636~1637년 겨울에는 ‘바람거래’로 불리며 튤립 선물거래가 나타났다. 이때 선물거래는 매도자가 미래의 일정시점에 정해진 종류의 튤립뿌리를 전달하기로 약속, 매수자는 받을 권리를 갖고 결제시점에 시가와 거래가 차이를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거래는 튤립뿌리를 캐는 다음해 봄을 만기로 하는 어음결제로 이루어졌다. 이 거래를 통해 6만길더를 벌었다고 자부한 투기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현금을 아직 손에 넣은 것이 아닌 타인의 어음 뿐이었다는 점. 투기광풍 최고조에선 튤립뿌리라는 실체가 없이 거래가 성사되고 있었던 것. 이 광풍이 사라질 즈음인 1637년 2월에는 튤립뿌리를 갖고 있지않아 현물을 인도할 수도 돈도 없어 결제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출처 픽사베이

 

황제튤립은 6000길더, 총독튤립의 두 배에 달하는 값이었다. 이 시대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1년 수입은 200~400길더 수준, 한 가정의 1년치 생활비는 보통 300길더 정도였다고 하니 튤립의 한 뿌리 가격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 알만하다. 튤립의 적정가격을 밝히려는 시도도 없이 일확천금을 노린 투기꾼들은 튤립을 전매하는데만 열을 올렸다.

 

 

이 시대 투기꾼들은 여름까지 돈을 지불할 수 없으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팔라고까지 했다고 하니 요즘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이라는 표현과도 상통함이 엿보인다. 투자는 여분으로 추가잉여를 일어켜 봄이라고 생각한다. 여분이 없다면 짊어질 수 있는 한도내의 레버리지 범위를 지켜야 한다. 이것이 투기와 투자의 차이, 그 사이에는 차가움이라는 냉철함이 있다. 개인의 판단력과 억제력을 강화하고 의지까지 키워야 할 것 같다.

 

 

1637년 2월 3일 튤립시장은 붕괴됐다. 현물을 인도하거나 결제해야하는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사실외 시장 붕괴의 원인이 없었다고 하지만, 폭탄 돌리기식의 실체없는 이 거래를 유지해 주고 버텨줄 힘이 튤립시장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튤립거래의 중심지였던 하를렘에는 더 이상 살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실제로 다음날 저가에 내놓은 튤립조차 전혀 팔리지않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현물매매도 이뤄지지않았고 어음부도가 연달아 발생했다. ‘소문에 사고 소문에 팔아라’라는 주식거래 방식이 여기서도 읽혀지는 대목.

 

 

출처 위키백과

 

 

네덜란드 경제는 튤립투기의 갑작스런 파국 소용돌이에 크게 흔들리지않았다고 한다. 이는 나라경제를 좌지우지했던 거상들이 튤립공황에 거의 영향을 받지않았기 때문. 피해는 고스란히 많은 서민들의 몫이었다. 불안한 튤립시장은 1638년 5월까지 1년이상 지속되자, 정부는 매매가격의 3.5%지급하면서 모든 채권, 채무를 정리토록 명령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게 됐다. 1000길더를 받기로 했던 튤립가격은 35길더가 된 셈. 튤립뿌리 수집가들은 튤립시장으로 돌아와 아주 혈값에 사들였고 2~3년후 황제튤립 가격은 투기 이전수준을 회복하게 됐다. 이들은 또 수익을 얻었지만 가난했던 서민들은 회복할 수 없었다. 그들이 투기를 벌였던 낮은 등급 튤립가격은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았다.

 

 

투자는 남이 한다고 따라해서도 안 된다는 것과 기업가치를 면밀히 분석 후 투자에 나서야 함까지 엿보이는 부분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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